ⓒ게티이미지뱅크오늘날 우리 식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식재료 중 하나가 올리브오일이다. 국내 유통되는 '엑스트라 버진(Extra Virgin)' 올리브오일의 종류도 이제 제법 다양해졌다. 최고 등급을 뜻하는 이 표현을 우리는 별 의문 없이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 익숙한 단어 속에는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한 낡은 은유와 시대착오적 시선이 담겨 있다.
'버진(virgin)'이라는 표현은 본래 여성의 신체적 경험 유무를 가치 판단의 잣대로 삼던 관념에서 파생된 말이다. 과거에는 '순결함'이라는 가부장적 가치를 품질의 은유로 빌려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날의 소비자는 특정 성별을 대상화하는 상징을 통해 식재료의 등급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오일의 산도, 맛과 향, 원재료의 신선함이지, 누군가의 신체를 연상시키는 비과학적인 비유가 아니다.
세계 곳곳의 산업현장에서는 이미 이 구시대적 표현이 퇴출되고 있다. 뷰티 산업에서는 '버진 헤어' 대신 '내추럴 헤어'와 '언트리티드 헤어(Untreated hair)'가 표준어가 됐다. 섬유산업에서는 '버진 울'이 점차 '뉴 울'과 '퓨어 뉴 울'로 대체되고 있다. 코코넛 오일 시장도 실제 공정을 설명하는 '콜드 프레스드(저온 압착)', '언리파인드(비정제)' 등의 언어를 앞세운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신인 작가의 첫 작품을 '처녀작'이라 부르던 관행은 문제의식을 거치며 '첫 작품', '데뷔작'으로 자연스럽게 교체되고 있다. 이는 누군가 금지해서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건강한 인권의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표현을 함께 찾아낸 결과다.
이제 올리브오일의 언어도 바뀔 때다. 품질 기준은 존중하되, 그 표현을 물리적 공정과 자연성에 초점을 맞춘 명칭으로 옮겨보자. 필자는 '엑스트라 버진' 대신 '퍼스트 내추럴(First Natural)' 혹은 ‘천연 올리브초생유(初生油)’를 제안한다.
'First Natural'은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연상태를 강조하고, '초생유'는 처음 짜낸 기름이 가진 신선함과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무엇보다 오늘날 고품질 오일은 거친 압착이 아니라 정교한 원심분리 등 과학적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런 현실을 여전히 성적 은유가 담긴 언어로 감싸둘 필요는 없다.
새로운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진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약속이다. 실제로 필자는 동료 수입사들과 이 논의를 시작했는데, 수십 년간 굳어진 국제적 관행을 넘어서는 일이 결코 녹록지는 않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한 논의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쓰는 말의 배경을 의식하게 된다. 한국이 동아시아 식문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지금, 우리가 먼저 시도해 볼 만한 변화다.
식탁 위 재료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재료를 부르는 말의 품격까지 바뀌는 일. 그것이 오늘의 식문화가 성숙해지는 과정일 것이다. 식탁 위에서 쓰이는 언어의 온도를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식문화의 완성일 것이다. ‘First Natural, Not Virgin’ 캠페인을 제안한다.
오세호 Food Curator·Italinea 대표·에세이 '와인이 별건가?' 저자